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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산이야기

이나와시로 호수・아사카 수로・아사카 개척을 잇는 스토리

메이지 유신 이후 무사들을 구제하고 신산업을 통한 근대화를 꾀하기 위해, 아사카 지방 개척에 큰 관심을 가진 오쿠보 도시미치. 꿈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쓰러진 그의 구상은 고리야마 서편의 상공에 있는 이나와시로 호수에서 물을 끌어 온 “아사카 개척・아사카 수로 건설 사업“으로 실현되었다.

 오우 산맥을 통과하는 “하나의 수로“는 외국 최신 기술을 도입하고 이 지역과 전국의 인력, 물자, 기술을 집결하여 고난을 극복한 끝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이나와시로 호수의 물을 관리함으로써 쌀과 잉어 등 식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고, 나아가 수력 발전에 의한 방적 등 새로운 산업의 발전을 불러왔다.

 미래를 연 “하나의 수로“는 다양성과 조화를 이루며 공생하는 풍토, 개척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정신, 그 정신이 담긴 벚나무와 함께 지금도 이 땅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미래를 개척한 “하나의 수로“ ―오쿠보 도시미치의 “마지막 꿈“과 개척자의 궤적 고리야마・이나와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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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와시로 호수

아사카 들판으로는 흐르지 않는 꿈의 호수

고리야마(아사카 지방)의 서쪽 하늘(해발 514m)에 위치하며, 풍부한 수량과 더불어 하늘을 비추는 거울처럼 아름다운 호수, 이나와시로 호수.

고리야마에는 “이나와시로 호수 물을 아사카 들판으로“라는 수로 개척 구상이 에도 시대부터 존재했다. 들판이 점점 더 고갈되어 가자 사람들은 물을 두고 다투며 기우제나 풍작 기원을 위해 불꽃을 쏘아올리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이나와시로 호수의 물은 서쪽으로 흐를 뿐 오우 산맥이 솟은 동쪽 아사카 들판으로는 흐르지 않았다. 게다가 수자원의 이권 문제가 있어 아사카 수로 개척은 꿈 같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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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가이세이샤 사원

오쿠보 도시미치, 아사카의 땅에서 “꿈“을 꾸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 근대화를 향한 전례 없는 개혁을 겪은 일본. 메이지 4년(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서구 국가들을 약 1년 10개월에 걸쳐 시찰했다. 그리고 서구의 발전을 직접 보고 국력의 차이에 압도당했다. 그들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부국강병"을 슬로건으로 삼고 신산업 육성을 목표로 하는 "식산흥업(殖産興業)"의 발전이 급선무임을 통감했다. 이 사절단에는 아사카 들판 개척을 크게 좌우한 훗날의 후쿠시마현령 야스바 야스카즈와 내무 대신 오쿠보 도시미치가 참가했다. 그들은 개척과 산업 진흥이 발전의 원천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야스바는 한발 먼저 귀국하여 곧바로 후쿠시마현의 개척에 착수했다.

메이지 6년(1873년), 후쿠시마현 개척에 호응한 고장의 대상인들은 "가이세이샤"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관개용 못을 정비하고 포도 등 해외 과수를 심는 한편, 서양 농기구를 이용하는 참신하고 근대적인 서양 농법을 도입한 개척지에서는 수확량과 인구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마을이 탄생하였다.

한편으로 개척 사업소가 설치된 "가이세이칸"은 서양풍 건물을 고장의 목수들이 목판화 등으로 보고 흉내 내어 지은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또한 가이세이샤 사원들은 양복을 입고 적극적으로 서양 문화를 도입하면서 개척을 추진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는 진취적 기질을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메이지 9년(1876년) 메이지 천황의 도호쿠 순행을 위해 사전 방문한 내무 대신 오쿠보는 후쿠시마현과 가이세이샤가 추진해 온 이 관민 일체 개척 사업의 성공에 감격했다. 오쿠보는 "식산흥업"과 개혁으로 궁핍해진 무사를 구제하는 사족수산(士族授産)" 을 연계한 전국적 모델 사업을 광활한 들판이 있는 아사카의 땅에서 다른 후보지보다 먼저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땅에는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 풍부한 물이 있는 이나와시로 호수, 그리고 진취적인 기질을 지닌 개척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쿠보는 메이지 11년(1878년) 3월에 사업안을 제출했고 정부는 예산을 산정했다. 그러나 사업 개시 직전 오쿠보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는 사망하기 바로 전까지 당시의 후쿠시마현령을 만나 개척에 대한 마음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오쿠보의 “꿈”은 개척자와 그 정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메이지 정부의 첫 국영 농수업 수리 사업인 "아사카 개척 ・ 아사카 수로 건설 사업"으로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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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주롯쿄 수문

새로운 도전, 우뚝 솟은 산맥과 시대를 개척하다

메이지 11년(1878년) 11월 규슈 구루메 번을 필두로 전국 9개 번을 중심으로 구 사족과 그들의 가족 2,000여 명이 칼을 버리고 들판을 개척하기 위해 이주해 왔다. 이주자들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새 땅에서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자 고향의 신사 등으로부터 분령을 받으며 힘을 모아 개척에 매진했다. 특히 민심을 융화시키기 위해 당시 이세 신궁에서 유일하게 분령을 허가받은 "가이세이산 다이진구"는 많은 이들이 마음을 의지하는 장소가 되었다.

메이지 12년(1879년) 이 "가이세이산 다이진구"에서 전례 없는 큰 공사의 안전과 성공을 기원하는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착수한 작업은 아사카 수로 성공의 열쇠이자 아이즈 분지와 아사카 들판의 물 흐름을 조정하는 "주롯쿄 수문"의 건설이었다. 네덜란드인 기사 반 돈의 감수 아래, 일본 최초로 근대 토목 기술을 수로 설계에 도입했다는 점이 혁신적이었다. 기존의 경험주의에서 벗어나 당시의 최첨단 기기를 활용해 실측 데이터에 기초하여 과학적으로 검토하는 새로운 설계 방식이었다.

이 검증을 통해 아사카 들판에 물을 보내도 서쪽으로 흐르는 수량이 줄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면서 장기간 큰 과제로 남아있었던 수자원 이권 문제 해결을 이끌어냈다. 또 이나와시로 호수의 범람으로 고통받던 호안의 주민들은 주롯쿄 수문이 치수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멀리서 찾아와 자원봉사로 공사에 참여했다. 그 인원 수는 500명 이상에 이르러 이 공사를 약 1년 만에 끝냈다.

수로 공사의 가장 큰 난관은 오우 산맥에 전장 585m의 터널을 뚫고 아사카 들판까지 물을 단번에 보내는 일이었다. 단단한 바위를 깨는 다이너마이트, 지하수를 밖으로 퍼내는 증기 펌프, 보강을 위한 시멘트 등 외국의 최신 기술이 사용되었다.

또한 가고시마, 오이타, 도쿄, 요코하마, 이와테, 니가타 등 전국에서 많은 기술자들이 모였다. 아사카 들판과 이나와시로 호수를 잇는 개척자들의 도전은 수로 개통이란 결실을 맺어, 향후 나스 수로와 비와호 수로의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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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 수로 완성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하야마의 폭포

혜택과 발전을 가져다준 이나와시로 호수, "꿈"의 토대가 된 풍토

메이지 15년(1882년), 약 3년이란 세월에 걸쳐 총 85만 명의 인력과 당시 국가 예산의 약 1/3이 투입되어 수로 52.1km, 분수로 78km로 이루어진 아사카 수로가 완성되었다. 이 수로의 통수식에는 정부 요인 등 수만 명이 모여 사업 성공을 축하했다.

아사카 수로가 대지를 적시자 약 4,000ha였던 쌀 농작 면적이 최대 10,000ha 이상으로 확장되었다. 수확량은 약 4,500t에서 10배 이상으로 대폭 증가하여 풍요로운 땅으로 다시 태어났다. 또한 맑은 물이 1년 내내 흐르게 되어 잉어 양식이 활발해졌다. 각각의 생산량이 전국 기초지자체 중 1위를 기록할 만큼 음식 문화도 풍성해졌다.

메이지 후기부터는 수로의 낙차를 발전에도 활용하기 위해 당시 최고 기술을 결집하여 "누마가미 발전소"를 건설했다. 그곳으로부터 23km나 떨어진 고리야마로 11,000v의 고압 전력을 보내는 일본 최초의 장거리 고압 송전이 성공하여 전국을 놀라게 했다.

이 전력은 제사(실 제조), 방적 등 고리야마의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 후 주롯쿄 수문을 활용해 이나와시로 호수 서쪽에 건설된 새 발전소에서 관동 지방으로 송전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 3위의 장거리 송전이라 불리며 근대 일본을 지탱했다. 그리고 개척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장래의 인재를 키우기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나아가 은행 설립과 철도 개통으로까지 이어졌다.

"아사카 개척 ・ 아사카 수로 건설 사업"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국과 세계로부터 사람, 물자, 기술, 나아가 문화 등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조화롭게 공생한다는 이 땅의 풍토에 힘입어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농업 ・공업 ・상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일본 근대화를 실현코자 이 사업에 열정적으로 임했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마지막 꿈”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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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활짝 핀 가이세이산 공원

개척자들의 정신, 미래에 꽃을 피우다

전국에서 모여든 이주자와 기술자, 정부, 그리고 아사카의 땅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함께 이룩한 아사카 개척. 일찍이 후쿠시마현과 가이세이샤가 개척을 추진할 당시, 관개용 못의 둑에 약 3,900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 개척의 역사를 지켜봐온 왕벚나무 노목은 지금도 봄이 되면 가이세이산 공원의 제방 일대를 꽃으로 뒤덮는다.

가이세이샤의 사칙에 "우리 세대에는 작은 묘목일지라도 언젠가 큰 나무로 자라 아름다운 꽃이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리라"는 의미의 구절이 있다. 이렇듯 미래를 생각하는 정신이 새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정신은 지금도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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